이 책은 우리가 가진 전제에 관한 내용이며, 이러한 전제가 삶에 미치는 영향을 다룬다. 전제는 우리의 사고방식과 가치를 형성하고, 우리의 행동과 태도를 결정하는 토대가 된다. 전제는 우리가 누구를 만나고, 어떻게 시간을 보낼지 결정하는 모든 과정에 영향을 준다. 누구에게 투표할지, 어떤 옷을 입을지, 무엇이 옳고 그른지, 누구와 결혼할지, 언제 은퇴할지를 비롯한 당신이 생각하는 모든 결정에 전제가 깔려 있다.
그러나 놀랍게도 전제는 의사 결정 과정에서 가장 소홀히 취급된다. 우리는 보통 전제를 고려하지 않는다. 그저 당연하게 여길 뿐이다.
_1장 아테네와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전제, p. 16
지금도 건재한 이오니아의 대자연 개념과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비교해보자. 대자연은 전능하고 어디에나 존재한다. 대자연의 창조 능력과 존재에는 한계가 없다. 그러나 그것은 인격적이지 않다. 대자연은 당신과 대화를 나누거나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없다. 또 대자연은 당신을 사랑할 수도 없고, 인간처럼 이성적으로 사고할 수도 없다. 대자연은 합리성이나 목적이 아닌 임의로 움직인다. 우연히 자신을 만들어내고, 우연이 아미노산을 만들어 그것으로 생명체를 만들어내며, 우연히 물고기나 원숭이 같은 것에서 사람을 창조했다. 얼마나 많은 ‘우연’이 발생해야 하는 걸까? 도대체 어떤 전제 때문에 이런 우연들을 신뢰할 만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을까?
_2장 누가 눈을 내리게 하는가? 하나님이신가, 대자연인가?, p. 45
다시 비행기 비유로 돌아가자. 계기판을 믿는 조종사는 그것을 의지하고 그에 따라 행동한다. 그러나 자신의 균형 감각을 믿는 조종사는 자기 사고와 감각을 의지한다. 모두 적절한 근거가 있기에, 이 두 가지 믿음을 비이성적이고 근거 없는 ‘맹목적인’ 믿음이라고 할 수는 없다. 문제는 인간의 감각에 의지하여 안개 속을 비행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다. ‘맹목적인’ 믿음이란 안개 속을 비행하는 조종사가 계기판이나 자신의 감각을 전혀 의지하지 않은 채, 근거 없는 낙관주의로 조종석에서 눈을 감고 손을 떼는 것이다. 이는 절대 믿음도 아니고, 제정신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중요한 점은 계시를 믿는 것이 비이성적이거나 비합리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실제로 기독교는 아주 이성적이다.
_3장 도덕 질서와 이성, p. 70
그리고 같은 해 10월 2일, “워싱턴 타임스”는 싱어의 말을 인용하여 “장애가 있는 신생아를 죽이는 것은 도덕적으로 살인과는 다른 차원의 일이다. 때에 따라 장애가 있는 신생아를 죽이는 일은 절대 나쁜 것이 아니다”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이러한 생각은 정신적, 육체적 장애가 있는 사람들에게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 도대체 누가 어느 정도 불안정해야 죽일 수 있는지를 결정할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논리적인 결론에 따라, 장애인이든 아니든, 타인이 세운 인간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면 제거되어야 한다는 사상은 결국 우리 모두를 위협하게 될 것이다.
_4장 그리스의 전제와 환영받지 못한 아이들, p. 104-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