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 교인들은 교회 예배에서 이 말씀을 들었을 때 정신이 번쩍 들고 궁금증이 발동했을 것이다. “어떻게 죽은 동시에 살 수 있지? 어떻게 슬픈 사람이 항상 기쁘지?” 이런 의문도 생겼을 것이다. “가난한 사람이 어떻게 많은 사람을 부자로 만들지? 아무것도 없는데 어떻게 모든 것을 소유하지?” 역설은 우리의 관심을 끌며, 우리의 신앙에 도전을 제기하고, 더 깊이 생각하게 하며, 현명한 질문을 끌어낸다. 무엇보다 역설은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이끈다. 그 진리를 실천하면 영적인 어린아이에서 자라나 어른이 되는 복을 누릴 수 있다.
들어가는 글 _p. 10
중국에서 사역하는 친구에게서 어느 교회의 장로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 장로는 목사가 교회에 있는 동안에는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런데 목사가 전도 여행만 떠나면 태도가 돌변해서 교회 안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켰다. 그러다 목사가 돌아오면 다시 예전처럼 잘했다. 시간이 흐른 뒤, 그 장로는 자기 삶과 교회를 파괴했던 죄를 고백했다. 그 죄는 바로 교만이었다. “장로 직분을 받았을 때 사탄이 ‘이제 너는 중요한 사람이야’라고 속삭였어요. 그 말을 믿었더니 교만이 저를 사로잡았어요. 저는 교회를 섬기기는커녕 악한 일만 저질렀어요.” 하나님은 그 장로를 구하시고 그가 끼친 피해를 보수하셨다.
2. 약함이 강함이다 _p. 25-26
잘 정돈되고 헌신적인 나눔은 잠깐 살고 마는 세상에 발을 딛고 있는 우리를 속박에서 해방한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요일 2:15-17)이기 때문이다. 나눔은 우리 존재와 소유, 행동에서 드러나는 모든 선한 것이 하나님에게서 온다는 점을 떠올리게 해준다. 분수에 맞지 않게 사치품을 쌓는 데 혈안이 된다면 근심만 늘어갈 것이다(마 6:25–34).
3.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 _p. 47
당신은 칭찬이나 비판에 어떻게 반응하는가? 어떤 사람이 당신을 완전히 무시하면, 관심을 끌고자 노력하는가? 혹은 다른 사람과 자신을 자주 비교하며, 속으로 그들을 비판하고 자신을 칭찬하지는 않는가? 교만은 질투를 일으키며 질투는 비판을 야기한다. 당신은 자신을 판단할 때보다 남을 판단할 때 더 엄격하지 않은가? 비판에 능한가 아니면 남을 칭찬하고 격려하려고 애쓰는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려고 애쓰는가 아니면 원한을 품는가? 익명으로 남을 도울 기회가 있으면 기분이 좋은가 아니면 갖은 생색을 내며 사람들의 관심을 얻으려고 애쓰는가(마 6:1–4)?
4. 낮아지는 것이 높아지는 것이다 _p. 59
우리는 꾸준한 개인 훈련(운동선수라면 다르겠지만)을 무시하고 속도와 쾌락을 강조하는 문화 속에서 살아간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보다 즐기는 게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과연 그러한가?
6. 가만히 있는 것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_p. 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