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시기와 관계없이 누군가가 내릴 수 있는 최고의 결정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겠다는 것이다.”-1장, p. 26
문제는 이런 접근 방식이 정보 습득과 자격증을 우선시하는 우리 사회의 풍토와 맞아떨어지지만, 예수님이 첫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과정은 제대로 반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런 과정들은 그 자체로 매우 유익할 수 있지만, 매일의 일상이라는 맥락에서 믿음을 실천하고 나눌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교회의 여러 직책에 필요한 사람을 양산하게 된다. 삶에서 신앙이 분리됨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 제도의 제자가 되어버린 사람들이 생기는 것이다. 마이클 윌킨스가 지적한 대로 때로 “우리의 제자도 프로그램이 진정한 제자도를 좌절시킨다. 우리는 우리가 만든 프로그램에 골몰한 나머지 실제 삶과 우리 자신이 괴리된다.”-2장, p. 83
제자도는 어떤 과정이나 그리스도인이 되어가기 위한 하나의 단계가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을 형성해가시도록 내어드리는 지속적이며 일생이 걸리는 과정이다. 이 과정은 우리가 하나님과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볼 때에야 비로소 완성될 것이다.-3장, p. 132-133
퀘이커 신학자 엘턴 트루블러드(Elton Trueblood)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께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중심 거점들을 만들고 이것으로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세상이 이렇게 해서 구속받을 수 있을지 우리는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이 외에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초창기 그리스도인들은 분명히 이런 시도를 했다. 3세기 카르타고의 테르툴리아누스는 이교도들의 공동체와 교회의 차이를 이렇게 묘사했다. “이방인들은 ‘보세요. 저 사람들이 어떻게 서로를 사랑하는지를요’라고 말한다(이방인들은 서로를 미워하기 때문이다). ‘저 사람들은 서로를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어요’(이방인들은 언제라도 서로를 죽일 수 있기 때문이다).”-5장, p. 217-218
새 신자들은 교회 문턱을 넘어서서 교회 안으로 들어오지만, 겨우 저녁 성경 공부반에 있는 자신들을 볼 뿐이다. 어느 해 참석했던 자정의 크리스마스 예배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이날 목사님은 성육신의 메시지를 성경 공부에 한 번 더 참여하라는 권유로 축소해서 전했다. 물론 그 설교자의 설교가 틀렸다고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나는 우주의 시작과 끝을 인간 역사의 이 놀라운 한순간으로 포착한 것 이상의 뭔가를 고대하고 있었다. “성경 공부에 더 열심히 참석하는것”은 내가 잠을 미루면서까지 듣고 싶었던 메시지는 정말 아니었다.-6장, p. 242
교회의 ‘새로운 표현 운동’은 각기 의도적으로 외부에 초점을 맞춘다. 그것은 “변화하는 문화에 맞는 교회의 한 형태로 특히 아직 어떤 교회에도 속해 있지 않은 사람들이 혜택을 입도록 기획되었다.” 다시 말해서 새로운 표현은 단순히 기존 교인들을 위한 교회의 새로운 존재 방식이 아니라 의도성을 지닌 선교 운동이자 외부 지향적인 운동이다. 웹 사이트에서는 교회의 ‘새로운 표현 운동’에 대해 “경청, 봉사, 성육신적 선교, 제자 삼기의 원리들을 통해 이 운동을 실천할 것이고, 문화적 상황에 맞게 복음과 교회의 영원한 표식으로 만들어지는 교회의 성숙한 표현이 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설명한다.-6장, p. 248
모잠비크 국경 근처의 마사이에서는 한 동료가 새로 작곡한 찬송을 함께 배우며 첫 모임을 축하하는 교리 문답사들 덕분에 나는 잠들지 못하고 계속 깨어 있어야 했다. 그곳에서도 나는 흰색 복장의 바로 그 교리 문답사들이 전율이 흐를 정도로 아름다운 화음을 만들며 부르는 노래를 들으면서 마무리 성만찬의 풍성함을 만끽했다. 서구의 어떤 전문 합창대와 견주어도 전혀 뒤지지 않는 노래 실력이었다. 아마 내가 들은 가장 아름다운 노래일 것이다. 우리 내면에 깊은 공명을 일으키며 날아오르듯 가슴을 두들기는 마사이족의 노래를 들으며 스르르 잠이 든 적도 있었다. 혼연일체를 이루지만 공격적이고, 각 사람의 가능성을 최대한 끌어올리는 가운데 하나의 공동체로 이어주며, 부족의 전통들을 공적인 믿음을 선언하는 데 모두 쏟아부을 듯 부르는 노래였다. 노래는 많은 일을 한다. 그러나 항상 관계와 관련이 있다.-6장, p. 271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내용과 개인적이고 국가적인 안녕을 추구하는 데 매진하는 우리가 오늘날 찾고 있는 것 사이에는 거대한 간극이 존재하는 것 같다. 우리는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 톰 사인(Tom Sine)은 서구 사회를 지배하는 풍요로운 생활과 더 나은 미래에 대한 심상은 계몽주의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계몽주의는 우리 세계를 이해하는 강력한 신화를 제공했을 뿐 아니라 회복하도록 초청받는 더 나은 미래에 대한 새로운 심상, 즉 새로운 세속적 구원의 심상을 제공했다. “본질적으로 계몽주의의 스토리텔러들은 하나님나라에 대한 수직적 추구를 수평이 되도록 옆으로 뒤집어버렸다. 이렇게 해서 서구적 진보와 기술의 숙달과 경제 성장이라는 수평적인 추구에 매달리게 되었다…우리는 더 나은 미래에 대한 이 비전을 서구의 꿈 혹은 아메리칸드림이라고 부른다.” 사인은 이것이 새로운 글로벌 질서 이면의 지배적 신화가 된 꿈이라고 주장한다. 우리 경제의 마케터들은 의미의 중개인이 되었다.-7장, p. 289-290
다양한 공동체와 네트워크에 속해 있으며 서로에 대해 잘 모를 뿐 아니라 하나님을 믿지 않고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의 이야기에 매여 있는 사람들에게 주일 예배는 이들을 선도할 행사로 충분하지 않다. 삶의 리듬을 구성하는 한 요소로서 주일 예배가 필수적일 수 있지만, 전체 공동체 모임에 한 번 참여하는 것만으로는 제자를 훈련할 수도 없고, 선한 일을 하도록 구비할 수도 없다. 우리가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명령에 충실히 하고자 한다면 혹은 바울이 말한 대로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려면 더 과감하게 모험해야 할 필요가 있다. -9장, p. 364
내가 젊었을 때는 오직 개인적인 영성 훈련을 강조했다. 특히 매일의 기도와 성경 공부를 강조하는 경향이 강했다. 개인 영성 훈련은 여전히 중요하다. 하지만 나는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인격을 형성하는 데 이런 영성 훈련만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지금과 비교하면 신앙의 초창기 시절에 기독교 이야기는 영국사회에 더 잘 알려졌고, ‘기독교적’ 가치는 절대적인 것으로 고수되지는 못했어도 최소한 중요한 규범으로 받아들여졌다. 오늘날 문화는 제자도를 지지하기는커녕 오히려 침해할 가능성이 더 높다. 지금 우리는 공동체적 훈련과 지지가 필요하다. 기독교적 삶의 방식, 즉 매일 예수님께 순종하는 삶을 적극적으로 지지해줄 공동체가 필요하다. ‘서로’라는 표현은 신약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며, 제자도의 삶은 이렇게 끈질기고 의도적인 ‘서로의 삶’으로 가능해질 것이다.”-9장, p. 369